싹수 있는 이야기
저는 식물을 참 못 키우는 사람입니다. 한국에서 아파트 살 때, 봄이 되면 이뻐서 작은 화분 하나둘 사들이다가도
얼마 안가서 반드시 시들시들해지곤 했습니다.
제게는 식물과는 상극인 특정한 기가 흐르는 건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그래서 어느 날 딱 결심을 했죠. 앞으로 절대 허튼 시도를 하지 않으리라, 그냥 자연속에서 보이는것만 보고 살리라,
남들이 잘 키우는 식물과 화초를 칭찬하고 구경만 하리라, 절대 좋아보인다고 스스로 뭘 해볼 생각을 일으키지 않으리라.
이곳 까페에서 잔디를 관리한다 꽃을 피운다 깻잎을 키워 쌈을 싸먹는다 하는 이야기가 암만 풍성해도 그건
딱 남의 이야기였습니다. 나는 안뒤야...
그러다가 봄이 되고 집앞뒤에 얼마 안되는 잔디가 넘들과는 다르게 누릇누릇한데다
군데군데 흙이 드러나는 부분이 영 보기 싫었지만
작은 화분 하나 관리 못하는 제가 잔디관리라니 넘 어려운 일이었지요.
하지만 노가다라도 하자 싶어 누런 잔디 긁어대는 일을 시작하며 슬금슬금 제가 정한 금기사항을 넘보기에 이르렀습니다.
아주 조그마한 흙바닥에 씨앗을 한번 뿌려부아? 아님 말고! 하는 발칙한 발상이 제 마음속에 싹튼것입니다.
씨앗을 사러 나가서 구경하다가 '글라디올러스'가 눈에 띄었어요.
글라디올러스라고라? 저의 장기기억에 저장된 바에 따르면 이 뒤엔 다알리아가 따라오는건데?
이건 알뿌리 식물에 분류된 식물 아니던가?
도대체 꽃이 어떻게 생긴지도 모른채 알뿌리 식물엔 글라디올러스, 다알리아, 히야신스, 블라블라...
다음중 알뿌리 식물이 아닌것은? 속에서만 기억하는 알뿌리란 이런거구나 하면서 글라디올러스를 들고 한참을 살펴보다
좋아 한번 해보겠쓰 하며 계산대로 향했습니다.
에미 못지않게 식물에 무지한 딸래미의 '엄마 마늘 심을라고?' -좀 비슷하게 생기기는 했더군요- 하는 말을 들으며
열심히 파묻었지요. 내심 이거 해보기는 한다만 이거 어떻게 될지 몰라 하는 짙은 자기불신과 함께.
그 후, 오며가며 흘깃 쳐다봐도 도무지 흙바닥밖에는 보이는게 없었습니다. 그러면 그렇지 역시 나는 안뒤야...
그러던중 초록의 무언가 돋아나왔습니다. 햐...이뿌기도 이뿔샤... 안되기는 뭐가 안뒤야 나오는구만 했는데
심지도 않은 저만치 다른 곳 여기저기 보이겠지요. 그건 그냥 이름모를 잡초였어요.
점점 모양이 다른 싹들이 비집고 올라오는데 뭐가 제가 심은 씨앗의 싹인지 알 수가 없으니 다시 자기불신 모드.
그런던 어느 날, 여느 풀들과 다른 무언가가 비죽 나와있는걸 발견했답니다. 바로 이거,
(고개를 왼쪽으로 90도 꺽어서 봐야 제대로입니다^^)
와~ 드디어 제 간절한 바람에 알뿌리 식물 글라디올러스는 응답을 해주었습니다!
그러다가 소식이 없이 오로지 요넘만 크더군요. 온리 유... 하며 들여다보는데 옆에서 또 한넘이 쑥 올라왔습니다.
그러더니 그 담날 또 한넘.. 한날에 심었는데 나오는 시기는 조금씩 다른것도 신기해하면서 스스로 배움을 챙깁니다.
같은 씨앗도 이렇게 다 다른거봐. 빠른 넘, 늦는 넘, 빠른 넘이 기쁨을 주는건 사실이지만 늦는 넘도 가치가 없는건 아니잖아.
각자가 똑같이 소중한겨... 나으 이 이민생활도 어려운중에 스스로가 못나보일때도 많지만
지금 내 하는 일 모두 헛되지 않으며 가치가 있는 일일거야...
기둘리자, 이 낯선 캐나다 땅에 씨앗을 심었으니 기둘리면 싹이 나오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을 날이 있으리라...
아기 잇몸에 돋아난 이빨마냥 고 작디작은 싹을 보며 온갖 비약을 해댔습니다.
아침이면 뭔 일 없나 들여다보고 해질무렵 한번 들여다보고.
식물은 정말 하루볕이 다르더군요. 아침에 하나 저녁무렵 하나 이렇게 솟고 있어요.
하도 오래 걸려서 제가 몇개나 심었는지 잊었었는데 확인해보니 18개를 심었었더군요.
전부 싹을 틔운다면 이제 4개가 남았습니다.
처음에는 한 개만 나왔을때도 그저 감격했었는데 아침 저녁으로 나오니 이제 쫌 잘난체 하면서 하는 짓은,
발아지점 예측하기 입니다. 낼 아침이면 요기쯤에서 하나 올라올거 같어...
화사한 5월의 햇살아래 쭈그리고 앉아 노래도 부릅니다.
싹이 나요 싹이 나
꼬옻밭에 싹이 나
밤낮으로 찾아요오
새로 나온 싹.
(새우깡 광고노래 개사한검다. 기억나시는지요? 손이가요 손이가 새우깡에 손이가. 언제든지 즐겨요 농심새우깡. 하던 노래^^)
다음중 알뿌리 식물이 아닌것은? 속에서만 존재하던 글라디올러스가 이 봄에 실재한 모습의 소중한 인연으로 제게 왔습니다.
여러분, 아름다운 봄이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