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제일 좋아하는 영어단어
내가 제일 좋아하는 영어단어는 dignity다.
예전에 말투와 '빠숑'으로 유명했던 어느 패션 디자이너가 즐겨쓰던, 앨레강스하며 퐌타스틱한 거 말고도 패션계에서 옷을 두고 평가할 때 이것을 쓰기도 하는 것 같다.
디그니티가 돋보인다, 범접할 수 없는 디그니티를 뿜어낸다...하는 식으로.
우리 사회에서는 dignity를 대개는 '권위'나 직위가 주는 높은 혹은 비싼 품격 정도의 의미, 혹은 고고함? 암튼 잘나신 너네들의 아우라쯤으로 여겨지는 것 같다.(고 적어도 나는 이해하고 있었다.)
그런데 캐나다에서 살면서 영어적으로 (영어적으로? 이건 좀 괴상한 말같다만) 느끼기에 꼭 그것은 아닌것 같은데...하는 의심 하나가 품어졌는데, 알고보니 인간으로서 누구나 갖는 dignity. 이 dignity는 높으신 어떤 분에게만 해당하거나 아무나 갖지 못하는 고가 브랜드의 상품을 소유하거나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드러나거나 뿜어지는게 아니라 인간이기 때문에 'respect' 되어야 하고 'support' 되어야 하는 그 무엇인거였다.(고 적어도 나는 받아들였다.)
작년에 한국에 갔을 때의 일이다. 한국에 살때 종종 들르던 알라딘 중고서점에 가서 책을 둘러보던중, 신문사 기자 출신으로 지금은 미국에 살고있는 이의 책을 집어 훑어보다가 나의 이런 막연한 의문이 딱 선명해지는 지점을 발견했다.
좀 옮겨보자면,
뉴욕에서 터 잡고 살기로 하면서 내가 처음 얻은 자리는 뉴욕 한국문화원의 리셉셔니스트였다. 처음 이 자리에 취직이 가능하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상당히 고민스러웠다. 리셉셔니스타라? 건물입구에 앉아 전화받고, 이 질문 저 질문에 답해주는 리셉셔니스트, 와우 쪽팔려라~ 하지만 영어에 능숙하지도 않은 내가 달리 찾을 수 있는 일자리는 딱히 없었다. 한 평보다 더 작은 공간에 앉아 하루종일 전화를 받다보면 '나는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질문이 절로 나왔다. 예전에 한국에서 알았던 좀 유명한 사람이 찾아오면 좀 더 쪽팔렸다. (중략)
무엇이 나의 존엄성을 지켜주는가? 나는 무엇인가? 나의 존엄은 어디에서 지켜지는가? 리셉셔니트 미경이는 과연 존엄한가?
뉴욕에 살다보면 이런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청소하는 저 아저씨 말이야 저래봬도 필리핀에서 학교 선생님이었대. 저 델리가게 아줌마 말이야. 한국에서 피아니스트였다나 뭐래나. 뉴욕엔 이런 사람들로 우글우글하다. 나도 그중 하나가 된 셈이다. 내가 어느 대학을 졸업하고 어느 신문사에서 일하고, 내 큰아버지가 시장이었고 내 친구가 원장이고 사장이고 국장이고 박사고 교수고...그런 것들을 누구한테 이야기할 수도 없고, 이야기해봤자 콧방귀나 핑핑 뀔 이곳 뉴욕 땅에서, 나의 존엄을 지켜주는 듯했던 수만가지 그 방패막이들이 완전히 무장해제된 이곳에서 천둥벌거숭이로 서면서, 나는 비로소 나의 존엄성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나의 존엄을 지켜주는 듯 보였던 외형적인 것들은 이제 이곳에 하나도 없다. 오히려 나의 존엄을 결정적으로 방해할 서투른 영어 억양이 추가돼 있을 뿐이다. 이제 새롭게 내가 보이기 시작한다. 천둥벌거숭이로도 존엄할 수 있는 내 속 존엄성의 알갱이가 보이기 시작한다. (중략) 나는 이런 자리에 앉아 있을 사람이 아닌 존엄한 사람이 아니라, 이런 자리에 앉아 있는 현재의 내가 바로 존엄한 나다...
(김미경의'브루클린 오후 2시'중에서)
캐나다에 살면서, 사실 요즘같은 세상에 태어난 나라가 아닌 곳에서 산다고 외국에 산다..혹은 타국살이 어쩌고 하는 느낌을 시시각각 의식하고 사는 것은 아니다. 그리 오래되진 않았지만 동화가 되네 마네, 이방인이네 아니네, 주류네 뭐네 따위를 주워 삼기고 앉았을 의미가 뭐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냥 나는 이 지점에 살고 있을 뿐. 어디에 살아도 나는 나로서 존엄하고 존엄한 한 인간으로써 존재할뿐.
근데 아마도 나는 이곳 캐나다에서 물질적으로 윤기나게 살기는 어려울듯 하다. 바라는바 그저 근근히... 한국에서 그렇듯 다른 사람에게 '행사하는' 상대적인 dignity가 아니라 원래 의미대로 자연인으로서 절대적인 dignity 문제에 더욱 관심을 갖게 되는 이유다. 다른 사람의 dignity를 존중하고 나의 dignity를 가꾸는 것, 이것이 나의 나아갈 바가 아닐까. 맨땅에 헤딩질하다 비로소 일어선것 같은데 이젠 맨몸으로 걸어가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나의 길. 지금은 어질어질 비척비척 걷고 있지만 조만간 가볍고 당당하게 걸어가게 되기를 바라는 내게 신간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소위 '뽀대'나는 인간들은 넘쳐나는데 진정 인간으로서의 '존엄'에 대하여는 글쎄...싶은 면들을 너무 많이 보는 요즘,
확 나를 사로잡은 제목. '무엇이 인간인가- 존엄한 삶의 가능성을 묻다.'
존엄한 삶의 가능성. 현재 내가 절박하게 갈구하는 주제이기도 해서 내게 길을 보여줄듯 하다.
아직 읽지 않은 상태에서 저자 오종우의 한마디를 옮겨보면,
산다는 건 회계장부를 만드는 일과 다르다. 손익계산서를 작성하는 일도 아니다. 수량을 세어 점수를 매기고 도표로 실적을 헤아리는 게 인생이 아니다. 산다는 건 한 점의 그림을 그리는 일과 같고, 한 곡의 노래를 부르는 일과 같다.
삶을 회계장부상에서 전투적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들으면 비루한 자들의 패배적인 소리라 일축할지 모르지만 나는 땡긴다. 공허한 낭만이나 비현실적인 감상 따위를 비웃을 때 '시를 써라 시를 써'하고 말하곤 하는 아는 사람을 떠올리고 웃음이 나왔다. 그렇다면 시를 쓰리라. 진정성을 담아 리얼리티가 녹아있는 솔직담백한 시를. 요즘 한국 소식을 듣자하니 점점 더 유전무죄 무전유죄인 세상이 되어가는 가운데 '쩐'없이도 존엄한 삶의 가능성, 끊임없이 모색할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