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션 뒷담화
이 글은 사실을 기초로 하여 재구성한 허구로서 내용에 등장한 이름이나 장소 등은 지어진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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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자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출근시간에 가까스로 맞춰 직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눈길에 조심조심 주차장에 들어섰을 때 언제나 친숙하고 개성있는 붉은 글씨 Tom Hortons 이 정겨울만큼 안도감이 밀려왔다. 왜 그렇게 여유있게 출근하는 일이 어려운건지. 민자의 평소 지론은 '인생은 5분이다' 인데도 그녀는 언제나 그 5분 때문에 늘 허겁지겁이다. 어쨌든 면지각만 해도 어디냐 하며 숨을 몰아쉬며 근무 로그일지에 기록하는데, 어제까지 없던 낯선 이름을 발견했다. Ellizabeth Kim? 응? Kim이면 반드시 한국인이 아닌가? 한국인이 잘 안쓰는 엘리자베스인게 좀 걸리지만 Kim은 분명 한국인일거야. Minja Lee 라면 중국의 성씨에도 Lee는 있는거 같고 가끔 다른 외국인중에도 Lee라는 성을 본적이 있지만 Kim은 틀림없이 한국인밖에는 없어, 하는데 생각이 미치자 민자에게는 만감이 교차했다는 표현이 적절할 그런 감정이 순간 들고났다. 뭔가 기대감도 있었고 우려하는 마음도 들었다. 흔히 외국에서 살면서 한국사람을 조심하라는 흔한 조언도 떠오르고 동시에 외로운 처지에 잘하면 직장내에 맘맞는 친구하나 둘 수도 있겠다 싶은.
엘리자베스의 첫 근무 날까지 민자는 가끔 미지의 한국인을 떠올리면서 나름대로 상상을 하곤 했다. 아주 젊고 발랄한 아가씨여서 똘똘하고 무엇보다 영어를 민자보다는 훨씬 잘해서 영어가 시원찮은 자신에 얹어 다른 동료들로 하여금 '영어 못하는 한국인'이란 스테레오 타입을 만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을 바라보고 민자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뭔 또 그런 비약을... 한편으론 그녀 자신과 너무 비교가 되면 그렇잖아도 영어 환경에서 위축될 때가 많은데 더 위축될 수도 있겠다 싶은 솔직한 마음도 있었다.
드디어 엘리자베스를 만나게 된 첫 순간이 다가왔다. 엘리자베스도 역시 먼저 일하고 있는 Minja Lee의 존재를 알고있던듯 익숙하게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적극적으로 연락처를 물어보며 밖에서 따로 만나자고 청해왔다. 민자는 엘리자베스가 자신과 같은 아줌마라는 사실을 알고 친숙함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경계심도 드는 것을 느끼며 약속을 잡았다. 민자는 한국에서 숱하게 보아온 '센 줌마들'에 데인터라 상대가 어느 '꽈'에 속하는지 대충 파악하기전까진 마음문을 확 열어제치긴 조심스러웠다.
엘리자베스를 인근의 다른 Tom Hortons 에서 만나기로 한 날은 눈이 내렸다. 좀 늦게 도착했는데 그녀는 입구에 들어서는 민자를 보고 손을 들어 환한 미소로 맞아주었다. 혹시 정많고 오지랖 넓은 아쌀한 왕언니 스타일?
한국인들이 처음 만나는 사람과 통성명후 시작하는 이야기는 흔히 나이, 사는 지역, 고향 등등 이 필수라 했던가. 그렇다면 외국에서 사는 한국사람끼리 만남 초반에 의례껏 하는 질문은 이것이 아닐까.
"캐나다에 오신지 얼마나 되셨어요?"
"나는 오래됐지. 한 28년 됐으니까"
"어우 진짜 오래되셨네요. 여기서 산게 더 많으시니 뭐 캐나다 사람 다 되셨겠어요. 영어도 되게 잘 하시겠다"
영어는 오래된다고 잘 하는건 아니라고 말하며 엘리자베스는 본격적으로 대화를 시작했다.
'민자씨는 여기 일한지 얼마나 됐어요?' '얼마나 벌어요?' '그거밖에 안돼요?' '솔직히 뭐 다 돈벌자고 일하는거잖아요. 안그래요? 아우 근데 그거가지고는...하...생각을 좀 해봐야 되겠네... 이거 뭐 가끔 밤에도 일해야 된다믄서 그거 벌자고...아우 생각을 좀 해봐야 되겠네 이거...'
'고작 그거 벌어가지고는 곤란한 벌이'를 먼저 몇 년 해온 민자앞에서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면서 말하는 엘리자베스를 보면서 민자는 왠지 그녀가 생각을 좀 해보고도 절대 그만둘 것 같지 않다는 직감이 강하게 들었다.
저녁시간이 한참 지나서야 자리에서 일어나 밖에 나오니 눈이 더 많이 오고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서로 고국을 떠나 이역만리에서 만나 오랜만에 오랜시간 모국어로 나눈 대화를 곱씹어 보았다. 민자는 문득 참 놀라운 사실을 발겼했다. 처음 본 사람에게 그 짧은 시간에 어쩜 그리 자신에 관한 많은 신상정보를 전달할 수 있는지 재주라면 재주라 할 수 있는 그녀가 참 놀랍게 느껴졌다.
엘리자베스는 오랫동안 토론토에서 비지니스로 '짭잘'했던 시절이 길었으나 최근 환경변화로 인해 때맞춰 털고 운좋게 부부 공히 직장생활로 전환, 워낙 많은 사회활동의 근거지는 토론토이나 온타리오 서남부께에 있는 몇 '에이커'의 '대출이 없는' 넓은 집을 관리하고자 '내려와서' 일부러 이쪽 지역에서 직장을 잡게 되었다는 이야기,요즘은 창이 서른 개 가까이 있는 집에 10만불을 들여 리노베이션을 계획중이라는 이야기, 원래 글을 쓰는 사람으로 글 쓸 때 가장 행복하며 캐나다에서도 왕성한 활동을 하는중이며 한국에서 모 문학상을 받기 위해 지난 여름 한국에 가서 수상하고 강연도 하고 왔다는 이야기. 한국을 떠나온지 오래되었지만 지금도 고국의 정치상황에 관심이 많아 캐나다에서 한국의 민주화를 위한 모임에서도 활동중이라는 이야기.
20대 초반에 캐나다에 와서 토론토 대학에 가려 했는데 친척이 캐나다는 간판보다는 실속이 더 중요한 문화라고 해서 토론토 대학을 안갔다는 이야기. 더불어 자신의 인성이 어떤 사람인지까지 자기입으로 말하는 사람이었다.
"나를 두고보면 알게되겠지만 아주 경우가 분명한 사람이에요... 남에게 피해를 주는 건 절대 용납 못하고 불의를 보고는 난 참지못하는 사람이야..."
민자씨는 종합해보니 짧은 시간에 엘리자베스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되었다는 생각을 하며 그나마 반대의 경우보다는 낫다는 생각을 하였다. 초면임에도 불구하고 빠른 시간에 너에 대해 간파한 후 내 나름의 분류표를 붙여주마 하듯 당황스러운 질문들로 마구 찌르고 들어오는 경우 말이다.
그 후, 엘리자베스는 민자를 만날 때마다 자신의 화려한 소셜 라이프를 피력할만한 이야기를 늘 던지곤 한다는 것을 민자는 감지했다.
"어우 나 이번 주말에 토론토에 모임이 있는데 스케줄을 어떻게 하냐. 내가 부회장이라서 안갈 수도 없고..."
"토요일에 우리 향우회에서 친선 골프대회가 있어서 토론토에 가야하는데 마침 일하는 날이라 큰일났네..."
민자는 어느새 엘리자베스를 만나면 토론토 이야기를 예상하게 될 정도가 되었다. 그러는사이 조금씩 민자의 내면엔 '엘리자베스 킴'대신에 '후까시 킴'이란 혼자만의 별명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아직 호감의 선 안쪽에 있었다면 "이번 주말엔 토론토에 안가세요?" 하는 인사말을 건넬법도 하건만 별로 그러고 싶지가 않았다. 이민연수가 훨씬 짧은 민자에겐 마치 토론토가 무슨 사교의 장 같게만 느껴졌다. 토론토엔 주말마다 지성과 교양, 그리고 끈끈한 정이 흐르는 화려한 모임이 펼쳐지고 그린필드에선 수시로 친선골프대회가 열리는.
점점 비호감의 선을 넘어 그쪽으로 확실히 진입하게 된 것은 엘리자베스의 다른 사람에 대한 태도였다. 가끔 매장에 행색이 후줄근힌데다 늙고 힘없어 보이는 사람이 커피 한잔 사들고 자리에 홀로 앉아있는 경우가 있는데, 그럴때면 엘리자베스는 그런 나이많은 고객을 아무리 못알아듣는다지만 얘, 걔 하고 지칭하며 "저렇게 오래만 살면 뭐하냐. 수명긴게 축복이 아니라니깐' 하며 노인을 비하하면서 말을 하곤 한다.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살짝 본인의 이미지가 우려되었는지 덧붙이기를, "내가 엠파시스가 있는 사람이에요. 노인들은 어떻게 될지 몰라. 내가 아는 누구도 암모니아가 없었는데도 그냥 시름시름 앓더니 가더라고..." 민자는 무슨 말일까 잠시 생각을 해야했다. 엠파시스? emphasis? 혹시 empathy를 말하는건가? 암모니아가 사인이 될 수가 있나? 뉴모니아(폐렴)라면 몰라도? 민자씨는, 아이라인 문신이 선명한 눈을 내려깔며 미간을 살짝 찡그리는 그녀 특유의 우아한 사모님 표정에 '엠파시스'와 '암모니아'가 겹쳐 브레이크 시간에 마시던 톰홀튼 커피를 하마터면 뿜을 뻔했다.
또 자신에게 불링을 한다며 동료를 흉본다는 점도 민자씨는 의아하게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누구누구도 그 사실을 알아채고 자기 편이 되어준다고 했으며, 매니저도 이 사실을 알고 원하면 다른 지점으로 옮길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했다고 말했다. 엘리자베스는 일한지 얼마 안되는동안 민자가 여태 보지못한 일을 혼자서 겪고 있네 하면서 엘리자베스에 대해 아직 단정할 수 없는 가운데 의아함은 더욱 커져가고 있었다. "지네들이 아주 우리가 동양사람이라고 딱 얕잡아 보고 그러는거지 뭐. 나는 절대 굽신굽신하지 않아. 내가 어떤 사람인데.."
그렇지만 엘리자베스의 굽신굽신 하지 않는 어떤 행동도 본적이 없다고 느끼면서, 민자는 서서히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더는 엘리자베스, 아니 후까시 킴 그녀의 페이지를 넘기지 않고 그냥 책을 덮어버리고 싶다고. probably bubbly한 그녀의 이야기는 계속 쓰여지겠지만 내 취향의 책이 아니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