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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주 '감정수업' 2독

마담파덩 2018. 2. 6. 13:37


강신주의 '감정수업'을 다시 읽었다. 좀 다른 맛으로 읽히던걸. 기록하여 곱씹고 싶은 내용이 다르다는 건 내 감정이 

움직이고 있다는 증거일까. 


비루함 

어린 시절 부모가 칭찬보다는 비난과 험담을 일삼았다면, 우리는 성장해서도 항상 슬픔의 감정에 사로잡히게 된다. 


경탄 

어떻게 대우해도 떠날 수 없는 사람에게 기쁨을 줄 필요는 없는 것 아닌가. 미워해도 나의 바짓가랑이를 잡을 것이고,

밀쳐내도 내게 안길 사람이라면 말이다. 상대방에서 철저하게 헌신하는 것으로 사랑이 지속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역효과만 생길뿐이다. 내가 모든것을 자기 뜻대로 한다고 상대방이 생각하는 순간, 그는 더이상 나의 내면을 섬세하게 

읽으려는 노력을 접을 것이고, 그만큼 나에 대한 사랑도 식을테니까 말이다. 


경멸

원칙적으로 말해 경멸하는 대상과는 함꼐 있지 않으면 모든 문제는 저절로 해결된다. 하나뿐인 소중한 삶을 경멸하는 

대상과 지내는 것만큼 불행한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자기만의 생각과 감정을 소중하게 여기고 있다면, 이사벨은 단호하게

오스먼드와 헤어져야만 했다. 그렇지만 이사벨은 자신이 생각한 것만큼 실제로 당당한 여성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사벨은 '지식과 자유가 결합된' 삶, 그러니까 자신만의 스타일대로 살아내는 삶을 꿈꾸었다. 그렇지만 이런 꿈도 사실 일종의 

허영이었던 셈읻다. 이사벨은 그렇게 사는것이 남들이 보기에 가장 멋진 삶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자유롭게 산다는 것과 자유롭게

살고있는 것으로 보이고 싶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이다. 그렇지만 남의 눈을 의식하는 사람이 어떻게 진정한 자유를 구가할 수 

있겠는가. 


자신만의 고유한 삶, 그러니까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충만한 삶을 영위하려면, 이사벨은 경멸하는 과거 자신과 철저히 단절해야 

할 뿐 아니라 경멸하는 대상과도 단절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했던 것이다. 


멸시

결국 서로에 대한 멸시는 사랑의 추억마저 산산이 부숴버리고, 마침내는 그들 내면마저 갈기갈기 찢어버리게 된다. 이런 자명한 

결말을 피하려면, 지금 당장 두 사람은 헤어져야만 했다. 그렇지만 조지와 마사는 모두 너무나 소심하고 나약했으며, 심지어 

비겁하기까지 한 속물들이었다. 


환희

남이 상처받는 것을 보기보다는 차라리 자신이 상처받는 것을 기꺼이 감당하고 마는 여린 사람들이 있다. 

결국 여린 성격의 소유자들에게 남는 것은 상대방이 자신에게 결별을 선언하기를 무기력하게 기다리는 일뿐이다. 어쨌든 인간이라면 누구나 슬픔과 우울의 감정에서 벗어나려는 삶의 본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겸손 

한 인간에게는 다양한 가치들이 존재한다. 노래를 잘할 수도 있고, 섬세할 수도 있고, 이야기를 잘 들어줄 수도 있고, 부드럽게 잘 안아줄 수도

있고, 여행을 좋아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런 다양한 가치들도 모조리 돈으로 살 수 있도록 만드는 것, 이것이 자본주의가 가진 폭력성이다. 

그런데 별로 돈이 안되는 가치들이 정말로 소중할 수도 있다. 영화나 음악에 대해 나와 함께 이야기할 수 있는 가치를 누가 돈으로 사려고 하겠는가. 


두려움 

어떻게 하면 두려움을 극복하고 현재의 삶을 향유할 수 있을까. 가장 중요한 것은 가벼움을 확보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가진 것에

연연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가진 것, 즉 건강, 젊음, 직장, 애인들은 모두 항상 떠날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지금 내게 있는 어떤 소중한 것에 대하여 그것이 곁에 머물러 있으면 행복한 것이지만, 그것이 떠나 버린다 할지라도 그것을 상실로 받아들이지말고 원래 상태로 돌아간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할 것, 그러면 안개가 걷히듯 어느 사이엔가 두려움이라는 감정은 여러분 곁을 떠나게 될 것이다. 


공손

온건한 사람은 표면적으로는 타인을 배려하는 공동체 의식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타인에 대한 공포가 드리우고 있는 짙은 그늘이 있다. 말 잘 듣는 아이는 그 공포감으로 인해 자신의 욕망을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희망 

속물은 속물을 만나고 진지한 사람은 진지한 사람을 만나는 법이다. 이것은 불확실성을 내포하는 단순한 희망이 아니라, 경험이 쌓이면 누구나

확실히 알게 되는 삶의 진리가 아닐런지. 


소심함

소심한 사람들을 대담하게 만드는 하나의 행동강령을 추천하고 싶다. '아님말고!' 최선을 다하는 것으로 만족하자는 것이다. 소심함을 극복하려면 그 결과가 뜻대로 되지 않을 떄 '아님말고!'라는 쿨한 자세를 갖는 반복적인 연습이 필요하다. 


에필로그

안전한 삶을 위해 현재의 열정적인 감정을 교살하는 삶,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는 삶이 과연 행복할까. 절대 그럴 수 없다. 왜냐고? 

지금은 미래로 보이는 때도 언젠가 우리에게 현재로 다가올 테니까. 그렇게 우리는 이미 현재가 된 미래에서도 또다른 미래를 위해 '지금 이순간'을 포기하게 될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미래에 더 큰 가치를 두느라 현재를 부정하는 삶이 이르게 되는 종착역은 바로 죽음이다. 이것은

유한한 삶의 진실이다. 그러니 현재 누려야 할 행복과 기쁨을 미래로 미루지 말라! 


남들이 부러워하는 감정이든 아니면 남들이 안타깝게 여기는 감정이든 간에, 자신이 느끼고 있는 감정에 따라 살아야만 한다. 자신의 삶을

충만한 현재로 살아가려면 별다른 방법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 자신의 감정에 어울리는 현실을 만들어 나가야만 한다. 그것이 자신의 감정을

지키는 방법이니까. 미움이나 당황의 감정이 들었다면 그에 부합하는 삶의 방식은 별거일 수도 있고 아니면 이혼일 수도 있다. 어쨌든 미움이나 당황이라는 감정을 안겨주는 사람과 함께 한 이불을 덮고 자고 한 테이블에서 밥을 먹는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행복과 기쁨을 추구할 힘을 

잃어버리는 순간, 우리에게는 잿빛 삶만이 남겨지는 법이니까. 


사람마다 좋음과나쁨의 기준이 다르고 동시에 좋음과 나쁨이라는 내용도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의 감정을 지키려는 자기만의 기준에 따라 살아가도록 노력해야 한다.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볼 필요는 업사. 단지 지금 내가 마주하고 있는 대상이 삶을 향한 의지를 강화시켜 준다면, 다시 말해 내 삶에 경쾌함을 준닫면, 그것은 '좋은' 것이다. 반대로 삶을 향한 의지를 약화시켜 내 삶을 우울하고 무겁게 만든다면, 그것은 

'나쁜' 것이다. '좋다'고 느끼는 것을 선택하고 '나쁘다'고 느끼는 것을 거부하라! 나의 삶을 유쾌하게 만들어 주는 것을 선택하고 반대로 우울하게 만드는것을 거부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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