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나부랭이 93

무한긍정의 사내

여기 한 사내가 있다. 흔한 표현으로 '고뇌에 찬' 모습이 별로 없어보이는 한 사내. 60여 년 그가 살아온 궤적에 생성된 일련의 사건들 또는 경험들은 그의 뇌안에 있는 밝혀진 바 없는 무언가에 의해 '무조건 긍정 모드'으로 전환되어 사고하게 되는 특이점이 드러났다. 이 사내를 학계에서는 비공식적으로 은밀히 연구 과제로 삼고자 하는 움직임이 활발하다는 카더라 통신도 떠도는 실정이다. 항간에서는 인류의 극소수만 보유하고 있다는 특정 분비물의 작용이라는 설도 있고 한편에서는 역시 희귀한 호르몬의 영향이라는 설, 유전자 자체가 100년 주기로 한번씩 나타난다는 설에 이르기까지 주장이 분분한 중이다. 뭘해도 중압감을 느끼지 않고 어떤 행위의 결과에 대해 과오를 과오라 여기지 아니하며 후회나 자책의 감정이 전혀..

글 나부랭이 2025.04.18

열풍 참 많은 나라

몸은 한반도의 지구 반대쪽에서 있어도 소식은 대략 다 알 수 있는 혜택받은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모르기로 작심 -가끔 시도하는 일이다-하고 외면하지 않으면 시간차를 길게 두지 않고도 한반도 남녘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대부분 알 수 있다. 대략 갖는 느낌은 참 '열풍'이 많다는 것.  언젠가부터 왠 트로트가 이리 떠들썩한가 싶게 온통 트로트 열풍이더니 이게 무엇인지 남몰래 찾아봐서 알아야 했던 탕후루 열풍, 그러더니 테니스가 열풍이라고 했다. 딱 그 무렵이었던 3년 전 한국에 방문했을 때 한 만남의 자리에 참석하게 됐다. 한 사람이 늦게 오면서 테니스를 치고 왔다고 하길래 나는 무심코 '테니스를 치시냐, 요즘 테니스가 유행이라더니 정말 그런가보다.' 고 이야기를 건넸다. 그랬더니 그는 30년 됐다고 했..

글 나부랭이 2025.04.13

불자동차는 아름답다

김훈 작가의 산문집 '라면을 끓이며'안에는 '불자동차'라는 제목의 글이 실려있다. 어릴 때 장래희망란에 '소방수'라 적었었다는 작가는 이 글에 소방차에 남다른 신념과 관심, 그리고 염원을 풀어놓았다. 평소에는 소방관 또는 소방차, 그들의 일에 큰 관심을 둔 적 없었다가 이 글을 읽고 적잖이 감동받았다. 질주하는 소방차의 대열을 바라보면서 나는 늘 인간과 세상에 대해서 안도감을 느낀다. 재난에 처한 인간을 향하여, 그 재난의 한복판으로 달려드는 건장한 젊은이들이 저렇게 사이렌을 울리며 달려가고 있다는 사실은 인간의 인간다움이 아직도 남아있고, 국가의 기능이 정확하고도 아름답게 작동되고 있다는 신뢰감을 느끼게 한다.  최근, 영화 '소방관'을 봤다. 재난을 다루거나 소방관이 등장하는 다른 영화와는 달리 소방..

글 나부랭이 2025.03.31

한밤의 질문

야간 근무를 할 때 가장 바라는 바는 님들이 푹 주무시는 일이다. 아기도 밤에 잘 자주는 건 엄마의 기쁨이고 아기인 자로서 큰 미덕이지 않나. 시설에서 돌봄을 받는 노인의 경우도 다르지 않을터. 침대에서 떨어지거나 공연히 자신의 능력을 오판 또는 과신하여 도움을 청하지 않고 무리하게 침대에서 일어나 무언가를 하기를 시도하다가 쓰러지거나 넘어지는 일 없이 그냥 쭉 길게 수면상태를 유지하는 일, 우리에게는 큰 행운같은 일이다.  이바는 아무 보조장치 없이 걷는 능력이 아직 멀쩡한 80대 여성이다. 이 분 역시 치매를 앓고있지만 난폭함을 비롯해 특별한 점은 없는 환자이다. 옷장엔 자신이 손수 만든 원피스, 뜨개질로 만든 니트 가디건들이 가지런히 걸려 있다. 작은 키에 그것을 입고 있으면 가끔 젊은 여성들의 글..

글 나부랭이 2025.02.28

부끄럽지 않은 부끄러움

'민낯들'(사회학자 오찬호 지음)이란 책에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온다. 저자가 대학원에 다닐 때, 새벽에 신문배달을 하고 지하철에서 무가지를 배포하는 일을 하면서 누군가 자신을 보는게 싫었다고 한다. 부끄러워서가 아니라 '공부하면서 힘들게 사네' 와 '공부는 언제하나?'하는 조롱의 경계선에서 무례한 분석 대상이 되는게 싫어서.  그래서 자신의 그런 사정이 공개되는 것을 꺼려왔는데, 교직원이 선의로 모 재단의 장학금을 받을 수 있도록 추천했고, 새벽엔 신문배달, 아침엔 무가지 배포, 저녁엔 대학원에서 조교 근무한다고 수여식장에서 소개를 하는데 자신은 비루함을 느꼈다고.  지난 팬데믹 시절, 한국은 이른바 'K-방역'이라 불리우는 방역 시스템하에 바이러스의 확산을 막은 것으로 유명했다. 개인들이 전체를 위해서..

글 나부랭이 2025.02.26

한밤의 긴급상의

어젯밤 나이트 근무를 할 때였다. 널싱 홈이라는 곳은, 밤이라고 해서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이냐 하면 그건 언감생심인 일. 밤에 다 잠만 자주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현실은 그렇지 않다. 아픈 일도 있고 응급실에 가야할 수도 있고 낙상 사고가 일어나기도 하고 세상을 떠나는 일도 일어난다. 밤에만 일어나는 일도 없고 밤에는 안일어나는 일도 없다.  한 밤에 콜 벨이 울렸다. 80대 후반의 남자 환자의 방에 가서 보니 긴히 상의할 일이 있단다. 목소리도 차분하고 음량도 나직하게 그리고 매우 진지한 표정이다. 임신을 했노라고. 애써 표정관리를 하면서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되물었다. 내가 알아, 확실히 나는 임신을 했어. 내 정자를 가지고 임신을 했다고. 남자는 임신을 할 수 없는거 아니냐고 물었다.그래 난 ..

글 나부랭이 2025.02.26

젓가락질 못하는 남자

내게는 고약하고도 쓸모없는 고정관념 또는 편견이 하나 있다. 젓가락질 못하는 남자가 싫다고 하는. 아니 다시 말하자. 젓가락질을 자연스럽게 해야 마땅함에도 못하는 경우를 말한다. 아 이것도 충분하지 않은 것 같다. 젓가락 문화권에서 나고 자랐는데 못하는 남자, 아 그게 맞긴 하겠으나 더 쉽게 가자.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한국남자인데 젓가락질 못하면? 실격이라 이거다.  내가 생각해도 참 이상한 편견이고 고집이다 싶다. 어렸을 때 나는 어른들처럼 젓가락질이 안돼서 좀 열등감이 있었다. 정작 부모님은 그걸 보고 야단치지도 않으셨는데 혼자 괜히 그랬다. 그게 어른같은 거라고 생각했나보다. 내 머리속엔 내가 하는 방식 젓가락 두 개가 벌어지지 않고 딱 붙은채 밑에만 벌려서 음식을 집느라 X가 되기 일쑤인 내 ..

글 나부랭이 2025.02.23

한일전 같은 캐나다 대 미국 아이스하키 경기, 모욕당한 자의 설욕

지난 목요일 저녁은 올겨울 춥고 유난히 눈이 많이 내리는 캐나다 전역을 후끈 달아오르게 만드는 일이 있었다. 아이스 하키 경기 때문이었다. 캐나다의 자존심 아이스 하키 경기에 대한 열광은 새로울 것 없는 일인데 그 날은 더욱 그랬던 것 같다. 왜? 요즘 돌아온 트럼프의 과감하고도 무례한 행보와 망발때문에 껄끄러워진 미국과의 경기였기 때문이다.  난 그날 저녁 나이트 근무를 하고 있었고 내가 투약시간에 약을 실은 카트를 밀고 복도를 오가는 동안 크게 틀어진 티비 중계 소리도 여느때와 다름없는 일상일 뿐이었다. 아이스 하키에 문외한인 나는 그날 어떤 경기가 펼쳐지는지 알바 없었고 누가 이기는지까지 뭐 그닥 큰 관심사는 아니었기 때문에.  힐끗힐끗 보면 몸싸움이 격렬해서 그 하얀 얼음바닥에 피가 뚝뚝 떨어지기..

글 나부랭이 2025.02.23

'첫빠따'로 코로나 백신을 맞다

이즘처럼 한 해가 저물무렵이면 신문이나 언론매체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기사가 있다. 한 해의 10대 뉴스 또는 올 해의 키워드 00 등등. 2020년의 경우, 그 둘에 다 해당되는 것을 단박에 꼽지못할 사람은 아마 없으리라. 코로나 바이러스.정체가 잡히지 않는 이 실체에 온 세계가 골머리를 앓으며 해결책으로 목말라하던 것이 바로 백신이었다. 백신이 나올 때까지 바이러스를 다스리기 위해 마스크며 거리두기를 시행해 오지 않았느냐 말이다. 그러던 어느날 백신이 개발됐다는 뉴스가 나왔다. 효율도 90%니 95%니 하면서 희망을 이야기했다. 그 숫자들을 보고 나는 단순 무식하게 이렇게 받아들였다. 약의 성능이 95점 정도 된다는건가. 고득점이니 믿어도 되겠네 끝.그러다가 Pfizer사에서 개발된 새 백신에 대해..

글 나부랭이 2021.0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