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민
약자를 도울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발생하는, 강자가 되었다는 자부심, 혹은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었다는 존재감,
이것이야말로 연민의 감정뒤에 숨겨진 이면의 정체다.
경멸
팀욕스럽고 이기적인 사람과 만나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을 때, 우리는 자꾸 타인을 배려하는 섬세한 마음씨를 떠올리는 경우가 있다.
이런 소중한 정신적 태도가 떠오를수록, 우리는 지금 내 눈 앞에 있는 사람 자체를 무시하고, 심지어는 부정하게 된다.
이런 우리의 마음 상태는 어떤 식으로든지 겉으로 드러나기 마련이다. 이럴 때 상대방은 우리가 자신을 경멸하고 있다는 걸 어렵지
않게 직감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스피노자가 말한 경멸이 발생하는 메커니즘이다.
원칙적으로 말해 경멸하는 대상과는 함께 있지 않으면, 모든 문제는 저절로 해결된다. 하나뿐인 소중한 삶을 경멸하는 대상과 지내는 것만큼 불행한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멸시
사랑이 미움으로 변할때, 사랑에 수반되던 '과대평가'의 감정은 이제 '멸시'의 감정으로 변하게 된다. 과대평가가 상대방을 이 세상의 유일한
주인공으로 만들어 주는 감정이라면, 멸시는 상대방을 평범한 사람보다도 못한 사람, 한마디로 벌레처럼 무가치한 사람으로 만드는 감정이다.
멸시라는 신호를 보냄으로써 우리는 상대방이 관계를 끊어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자신이 직접 미움의 관계를 단호히 청산하지 못하는 사람일수록, 그는 멸시를 통해 상대방을 막다른 궁지에 몰아넣으려고 한다. 관계의 시작과 끝에서 자신은 어떤 책임도 없다는 듯이. 그러니까 상대방을 멸시하게 될 때, 우리는 관계에 대한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지 않으려는 비겁함을 드러내는 셈이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누군가 나를 멸시한다면, 우리는 그가 모든 관계의 책임을 나에게 미루려는 연약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게된다. 그러니까 타인을 멸시하는 사람은 비겁한 사람이려고 하겠다. 자신이 원했던 것처럼 관계가 파탄나면, 그는 희생자 코스프레를 아낌없이 하게될 것이다. 마치 부당한 일을 당한 선량한 사람인 것처럼.
절망
비극적인 미래를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 상황이지만, 가느다란 희망의 줄을 놓지 않으려는 사람이 있다. 예상했던 비극이 빨리 오지 않자, 희망의 동아줄은 더 튼튼한 것처럼 보인다. 당연히 우리는 그 동아줄을 더 집요하게 움켜잡으려고 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시간이 흐르다 보면, 비극이란 있을 수도 없다는 확신이 더 강해지기도 한다. 물론 이것은 판타지에 불과하다. 자기중심적인 판타지를 견고한 성곽이라고 믿고 의지할 때, 절망은 강하게 우리를 찾아올 수밖에 없다. 판타지의 성곽이 무너지는 순간 거기 기대고 있던 우리도 땅바닥에 내동대이쳐질 테니 말이다. 절망에 자주 빠지는 사람들은 지나칠 정도로 비관론을 가지려고 노력하는 것도 좋겠다. 항상 최악의 경우를 염두에 둔다면, 미래에 대한 자기중심적인 기대로 줄어들기 마련이니까. 그렇지만 우유부단한 사람이 비관론을 품고 살아가는 것은 또 얼마나 힘든 일인가.
환희
여린 사람, 혹은 우유부단한 사람의 삶은 항상 무기력하고 우울한 법이다.
이미 헤어지기로 작정했다면, 상대가 힘들든 말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중요한 것은 함께 있을 때 행복하지 않기에 헤어지려고 하는 것인데 말이다. 때로는 이별과 결별이 어떤 사람에게는 행복일 수도 있다. 그러니 하루라도 빨리 행복해지기 위해 상대방에게 신속하고 단호하게 이별을 통보해야 한다.
단호한 결별에 주저하는 사람은 그래서 항상 우울할 수밖에 없다. 기쁨과 활기가 아니라 슬픔과 우울을 가져다주는 사람과 결별하지 못하고 관계를 지속하고 있으니, 어떻게 우울하지 않을 수 있을까. 당연한 일이다. 이렇게 남이 상처받는 것을 보기보다는 차라리 자신이 상처받는 것을 기꺼이 감당하고 마는 여린 사람들이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상대방에게 계속 무기력과우울함을 보이면서 지속적으로 '당신과 함께 있어서 나는 불행해요'라는 암호를 송출하니까 말이다.
결국 여린 성격의 소유자들에게 남는 것은 상대방이 자신에게 결별을 선언하기를 무기력하게 기다리는 일뿐이다. 어쨌든 인간이라면 누구나 슬픔과 우울의 감정에서 벗어나려는 삶의 본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겸손
겸손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자신을 지배하던 해묵은 편견, 허영, 그리고 자만심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색안경을 벗고 자신이나 세계, 그리고 타인들을 있는 그대로 보게되었다고나 할까. 그러니까 자신의 무능력과 약함을 직시할 때, 우리는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없는지를 정확히 알게된다.
따라서 겸손해진 사람은 이 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더 진지하고 성숙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성숙해진 것이다.
자만심에서 절망으로 왔다 갔다 해야만 우리는 균형잡힌 겸손에 이를 수 있는 법이다. 그럴 때 비로소 어른이 된다. 자신의 무능력과 약함도 알지만, 동시에 자신의 능력과 강함도 알게 될 테니까 말이다.
두려움
불행한 과거는 과거지사로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현재와 미래의 삶에도 질식할 것 같은 무게를 가하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은 과거를 통해
미래를 꿈꾸는 동물이다. 그러니 과거가 행복한 사람은 미래를 장밋빛으로, 과거가 불행한 사람은 미래를 잿빛으로 꿈꾸게 된다.
희망
바라는대로 되었다고 해도 혹은 되지 않았다고 해도 그 원인을 완전히 우리 자신에게만 돌릴 일이 아니다.
여기서 소심한 사람을 대담하게 만드는 하나의 행동강령을 추천하고 싶다. '아님말고!' 최선을 다하는 것으로 만족하자는 것이다. 소심함을 극복하려면 그 결과가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아님말고!' 라는 쿨한 자세를 갖는 반복적인 연습이 필요하다.
슬픔
기쁨을 주는 대상이 있다면 그것을 결코 놓쳐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슬픔을 주는 대상이라면 단연코 그것을 제거하거나 아니면 그것으로부터 떠나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다. 여기서 변덕이나 변심을 이야기하는 사회적 평판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쿨해질 필요가 있다. 선택의 결과를 스스로 책임지겠다는 단호한 의지가 아니라면, 우리는 결코 자기 감정의 주인이 될 수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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