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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언어의 기쁨과 슬픔

줄리 세디비 지음. 더 큰 문제는 이민 가족이 ‘언어 이주’를 하는 과정에서 세대 간에 적잖은 편차와 단절이 발생한다는 사실이다. 어린 자녀들이 새 언어를 빨리 익히는 것과 달리 부모 세대의 학습은 더디기만 하다. 자녀들은 모국어를 잊고 부모는 새 언어에 서투르게 되는 것이 일반적이고, 그것은 생각보다 큰 문제를 야기한다. “부모와 자녀가 한집에 살지만 서로 편한 공통의 언어가 없으면, 부모는 인생의 교훈을 전하거나 위로를 건넬 수 없고 심지어 자녀의 문제와 어려움을 세심하게 이해할 수 없다.”

[박노자의 한국, 안과 밖] ‘시험 공화국’의 짙은 그늘

박노자 |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우리는 대개 ‘선진국’이라는 용어를 구미권 국가들에 사용하곤 하지만, 사실 산업혁명 이전 세계에서는 동아시아야말로 선진권이었다. 종이나 금속활자, 화약, 그리고 로켓과 지폐 등 주요 발명품들을 독점했던 것부터 그 선진성의 한 측면이었다. 그런데 동아시아의 선진성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한나라에서 기원전 134년부터 시작되고, 신라가 788년에 독서삼품과의 형태로 수용한 시험을 통한 공무원 등용 제도는 그 당시 세계의 어느 다른 지역에서도 시행되지 않았다. 유라시아의 다른 제국인 비잔티움이나 아랍 칼리파국, 아니면 사산왕조 등에서 공무원 등용은 주로 집안의 신분이나 인맥으로 이뤄졌지만, 동아시아는 일찌감치 보다 객관적인 등용·고과 기준을 도입했다.그에 비해 유럽의 시..

[비평] 최근 한국 상업영화에 국가가 자주 등장하는 이유

글 송형국(영화평론가) 2023-02-22 국가라는 장르 71살 린다씨는 분홍빛 블라우스에 색깔을 맞춘 헤어밴드로 금발을 감싸고 있었다. 그가 우리를 만나자마자 보여준 건 아이폰에 있는 가족사진이었다. 수백장의 사진 속에서 남편과 세 자녀들, 그들의 배우자들, 또 그들이 낳은 자녀들이 웃고 있었다. 노스캐롤라이나의 중산층 가정에서 자라 보험사에서 일하다 출산과 함께 일을 그만둔 린다씨는 “손주들을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다”며 웃었다. 지난해 11월 미국 중간선거전의 민심을 들어보겠다며 자택을 찾은 취재진(필자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방송기자다.-편집자)을 따뜻하게 맞아준 그는 굵직한 초콜릿 칩이 촘촘히 박힌 수제 쿠키에다 음료를 내주며 장시간 질문에 답해줬다. 선거 후 공개되는 한국의 방송 프로그램이..

가난이 보이지 않는다 - 인아영 문학평론가

바야흐로 아이돌도 스토리텔링이 관건인 시대다. 4세대 아이돌 걸그룹의 지형도는 유독 스토리텔링이 각축하는 장이다. 레퓨지아라는 통제 도시에서 마법의 땅인 언노운을 향해 모험하는 소녀들의 이야기를 담은 르세라핌의 ‘크림슨 하트’나 가상세계에서 자신의 또 다른 자아이자 인공지능인 아바타를 만나서 블랙맘바를 물리친다는 서사를 가진 에스파의 ‘광야’와 같은 세계관이 그 좋은 사례다. 이 와중에 뉴진스는 순수하고 청량한 10대 소녀들이라는 뚜렷한 콘셉트에 비해 이를 뒷받침할 만한 스토리텔링이나 세계관이 비교적 풍부하지는 않은 편이다. 인아영 문학평론가 이를 두고 도우리 작가는 한 칼럼에서 어려운 집안에서 고생하며 자수성가했다는 극복 서사로 대중의 호감을 얻었던 과거 아이돌과 달리 오늘날 아이돌은 그 반대로 “태어..

'중꺽마'는 아름답기만 할까

[오늘을 생각한다]‘중꺾마’는 아름답기만 할까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 2022년 카타르월드컵에서 한국 선수들이 흔든 태극기에 적혀 있던 문구다. 한 e스포츠 선수의 인터뷰에서 유래한 이 문구에 많은 사람이 희망을 담아 이야기했다. 월드컵 이후 언론은 ‘누칼협의 시대가 가고 중꺾마의 시대가 왔다’며 붕어빵틀로 찍어낸 듯한 기사를 내보냈다. 정지우는 ‘중꺾마’를 ‘타인을 생각하는 마음’이라 했고, 심너울은 ‘우리 세대의 정신 속에 강력한 의지와 긍정성 또한 있다고 믿게 되었다’라고 했다. 한 사람의 강인한 의지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하지만 이 마음은 미시적으로 볼 때만 아름답다. 중꺾마의 세상을 줌아웃해 전체를 조망해보자. 모두가 서로를 향해 비장한 결기를 다지는 풍경. 모두가 중꺾마를 외치는 세..

다정함이 세상을 구한다 -윤단비

ⓒ게티이미지뱅크 나는 얼마 전까지 결핍과 시련이 사람을 성장시킨다는 믿음을 굳건하게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다. 인생에서 나를 성장시킨 근원은 어린 시절의 결핍이라 믿었다. 그래서 영화를 만들 때에도 시련과 고난의 시기를 통과하는 청춘의 이야기를 많이 다뤘다. 그 시기가 결국 지금의 나를 만든 시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30대가 되며 그것을 알게 되었다. 갑각류가 수십 번의 탈피를 거치며 몸집을 키우고 단단해지듯 그 과정이 불필요한 것이라고는 차마 말할 수 없겠다. 다만 인간과 갑각류, 파충류의 탈각, 탈피의 차이는 인간은 그 과정을 온전히 혼자만의 힘으로 나올 수 없다는 데 있다. 결국 본인이 해내야 하는 일임에는 틀림없지만, 혼자서는 결핍은 결핍으로 시련..

[로버트 파우저, 사회의 언어] ‘원어민주의’ 시대 막을 내리면서

로버트 파우저 | 언어학자 미국 수도 워싱턴D.C. 교외에 미 외교교육원(FSI)이 있다. 1947년 설립된 이 기관 업무 가운데 하나는 외국어교육과 평가다. 미국인이 외국어에 별 관심이 없다는 건 잘 알려졌지만, 외교관은 사정이 다르다. 법적으로도 일정 수준 이상의 외국어 실력은 갖춰야 하고, 근무 중에도 외국어 실력 평가를 자주 받는다. 이는 업무평가는 물론 승진, 급여 등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1958년부터 외교관의 외국어 실력 평가가 의무화되며 외교교육원은 오늘날 약 70여개 언어를 가르치고 100여개 언어 평가를 하고 있다. 민간에서 거의 가르치지 않는 언어의 학습 교재를 개발하고 이를 사회에 공개해 일반인 외국어교육에도 크게 공헌하고 있다. 무엇보다 영어 원어민들이 ‘전문적인 수준의 구사 능력..

네 거리의 짜증 -김훈

. 후배가 운전하는 소형차를 타고 동네 네거리를 지나는데, 앞에서 비싼 외제 승용차가 신호대기 하니까 후배는 멀리서부터 설설 기었다.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긁기만 해도 한 달 월급이 날아가거나 보험료가 올라간다’고 말했다.오토바이로 음식을 배달하는 라이더들에게 물어봤더니, 짬뽕 국물 식기 전에 가려고 자동차들 사이를 빠져나갈 때도 벤츠나 람보르기니, 벤틀리 옆으로는 얼씬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비싼 차가 그 운전자의 100% 과실로 싼 차를 들이박았다면, 비싼 차 운전자는 아주 싼 값을 물어주거나 보험처리하면 된다. 주차장에 세워놓은 비싼 차를 고의로 때려 부수었다면 마땅히 비싼 값을 물어주어야 할 테지만, 도로라는 공적인 공간에서 대등한 자격으로 운행하다가 발생한 사고에서 배상액이 이처럼 크..

[김누리 칼럼] 거대 위기와 새로운 정치

우리는 거대한 위기가 중첩된 복합위기의 시대에 살고 있다. 생태·국가·사회·교육의 위기가 삶을 근본에서부터 위협하고 있다. 해방 이후 대한민국이 이런 거대한 규모의 다층적 위기에 휩싸인 적은 없었다. (…) 기존 정치로는 다가올 위기에 전혀 대처할 수 없다. 전통적인 수구보수세력인 여당은 그 퇴행성과 시대착오성이 극단적인 상태이며, 거대 야당 또한 그 무능과 무비전이 참담한 수준이다. 김누리 | 중앙대 교수·독문학 지금 우리는 역사상 초유의 위기 앞에 서 있다. 어느 시대를 돌아보아도 오늘날처럼 인류 전체가 생사의 벼랑에 내몰린 적은 없었다. 생태계 파괴와 기후위기가 인간의 삶을 완전히 다른 차원에서 위협하고 있다. ‘22세기는 오지 않는다’, ‘지금 사는 인류가 최후의 인류가 될 것이다’라는 묵시록적 ..

사카모토 류이치

[단독] 유희열 논란 넘어…사카모토 “난 늘 내게 3가지를 묻는다 일본 영화음악 거장 단독 서면 인터뷰 “‘이게 내가 좋아하는 것인가?’ ‘다른 가능성이 있는 건 아닐까?’ ‘이렇게 하면 되는 것일까?’ 독창적인 작품 만들기 위해선 자신에게 물으며 헤쳐갈 수밖에” 사카모토 류이치. 최성열 기자 작곡가 겸 가수 유희열이 일본의 세계적인 영화음악 거장이자 작곡가인 사카모토 류이치 곡을 표절했다는 의혹이 최근 불거졌다. 이에 대해 사카모토가 에 직접 입을 열었다.사카모토는 “표절 (여부) 선 긋기는 전문가도 일치된 견해를 내놓기 어렵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음악 지식과 학습으로는 독창성을 만들 수 없으며, 독창성은 자기 안에 있다”고 강조했다.유희열은 지난해 9월 ‘생활음악’ 프로젝트의 하나로 내놓은 피아노..